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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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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아 필사를 하다가 생각난 a time for us

영화에서는 What is a Youth를 찾아보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고

이제 어쩌면 식상해진 무딘 십대의 사랑이 보고 싶은 건

내가 이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 한 번 찾아봐야지..

*이 영화를 주연한 두 배우는 실제 십대였다. >_<

*http://blog.naver.com/brucelee55?Redirect=Log& logNo=150059845360


2009/08/29 04:19 2009/08/29 04:19

Almost Famous 그리고 Billy Elliot

영화 2009/08/20 18:11 by 애나무
친구가 대성학원 대빵께서 해준 강의를 보여주었다. 뭐 강의 전체가 아니라 짧은 부분일 뿐인데, 그 요지는 "공부 못 하는 사람과 잘 하는 사람의 차이는 유전자가 80퍼센트정도 결정합니다. 근데 안 되는 놈들이 덤비니까 괴로운거에요. 미국을 보세요. 걔네는 이미 안 되는 애들을 다른 길로 인도할 줄 알아요. 자기에게 맞는 게 있어서 그거 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아요."라는 거다. 뭐 강의 전체도 아니고 짧은 문맥이거니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좀 씁쓸하긴 했다. 왜냐면 그걸 완전하게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욕이 절로 나온달지.

그래서 얼마 전에 본 Almost Famous와 Billy Elliot가 머리 속에 맴돌았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성장물이다. 다만 배경이 조금 다를 뿐. 한 쪽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다니며 르포를 하는 친구고, 한 쪽은 발레를 좋아하는 친구일 뿐이다. 이들은 극적인 만남과 사건들을 이룩하면서 자신의 꿈에 도전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승리한다.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전부이다.


재미있는 공통점은 이 두 아이 모두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으며, 가정에 불화가 있다는 것이다. 또 부모가 바라는 아이의 성장 모델과 아이가 그리는 성장 모델이 전혀 달라서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명한 차이점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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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단지 마케팅 도구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Almost Famous속 심리학 교수이자 두 아이(누나와 주인공)의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는데 극명한 의지와 견해가 있다.(주인공을 남들보다 2년 빨리 정규 과정을 패스시킨다. 그것도 주인공에게 나이를 속여서 [..]) 마치 사커맘처럼 교육열도 강하고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아주 강하다. 그러나 누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살지 않았고, 자기 내키는대로 살았다.(사실 어머니가 극성스럽게 하는 것도 맞다. 사이먼&가펑클을 마약을 찬양하는 시라고 하질 않나 ;ㅅ;) 그래서 영화 초반에 주인공에게 수많은 레코드를 물려주고 자신이 갈 길 간다. 물론 엄마가 반대하긴 하지만 그러한 딸을 쉬이 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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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Elliot의 편부모는 아버지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나이든 할머니와 형과 함께 탄광촌에서 살아간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으로 아주 가난하게 살아가며 그의 형 역시 아버지와 같은 광부다. 이 아이의 형과 아버지는 전형적인 마초다. 이 부자는 같은 곳에서 일하고 같이 파업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 물론 좀 급진적인 쪽은 젊은 형이다. 위의 영화의 누나처럼 주인공을 자상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레코드 좀 들었다고 지랄하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아버지보다 더 말이 많다. 주인공은 가정 분위기상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배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이 그랬던 것처럼 복싱을 배워야하고, 가정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상 할머니의 발언권은 말할 것도 없다. 뭐 남성권력 여성권력 이렇게 대충 찔러도 아귀가 맞을 것 같은 두 영화다. 프로이트는 정말 가져올 필요도 없고...


여하튼 이 두 주인공은 역시 재미있게도 가정에서 혹은 부모의 뜻과는 정 반대의 인생을 살아가려 한다. 어머니가 그렇게나 싫어하던, 누나의 출가선언의 빌미가 되었던 '락 스타'의 열렬한 팬이자, 학생 주제에 락 전문지에 기고하는 아이로 변모하고, 빌리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발레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용감하게 그곳에 뛰어든다. '락 스타'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든 것을 본다. 열렬한 팬이자 소년 기자로서 그들이 약하고, 음악하고 sex하는 모습을 밀착취재한다. 이미 취재가 아니라 그들의 근간을 이루는 진정한 팬이 된다. 그리고 빌리는 자신의 재능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디서든지 춤추고, 춤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던진다. 결국 두 주인공은 모두 자신의 부모를 '설득'한다. 설득 시키고 만다. 비록 교육의 방법과 교육 내용과는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함에도 부모는 막지 못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현실'도 있다. 당연하듯이 마약을 하는 이들에게 아들을 맡긴 부모는 얼마나 불안할지.(요즘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아들은 그 좋다는 '락 스타'를 위해 시험도 빠지고, 졸업식도 안 나온다. 빌리의 아버지는 빌리가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도저히 가정형편상 아이의 꿈을 도와줄 수 없다. 형 역시 빌리가 아버지나 자신처럼 월급쟁이로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기에 더욱 열렬히 노동 조건을 위해 파업을 하고 더 닥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장통을 거쳐서 주인공은 하나의 인격체가 되고 성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듯이 모든 이야기가 잘 풀려서 좋은 결말을 맞는다. 이씨, 그러니까 이게 문제다. 만약 모두가 정당한 노력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일까. 근데 이게 거의 불가능하다는거다. 대성학원 아저씨 말처럼 딱히 유전자 탓을 안해도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말이지. 만약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것이 등장한다면 영화는 얼마나 지루하고 피곤할까. 이러한 이야기로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잠시 "뿅"하고 가는거다. 환상 속으로, 잠깐의 감동 속으로. 우리에게 분명 어떠한 기대가 있기에 영화를 이렇게 만들고, 이야기를 쓰는 거다. 괜히 성장소설이 재미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역시 인류는 같은 이야기,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마치 진실인양 혹은 정의인양 보여질 수 있도록.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는 좋고 감동하면서 즐겁게 본다. 하지만 이 부조리한 현실을 인식할 때, 혹은 개개인의 노력이 비루한 것으로 비하될 때의 분노는 이겨낼 수가 없다. 대성학원 대빵이 아마 고교생들을 모아놓고 한 저 개소리가 그들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두렵다. 유전자로 인간의 가능성이 80퍼센트 결정된다고 믿게 된다면 그런 자들이 가까운 미래에 머리 위에 서게 되고, 내 아이의 머리 위에 있을 때의 공포란...


오늘 1분 남짓한 동영상 덕분에 오늘 잠도 못자고 열폭하고 있다. 부디 나의 노력과 다른 사람의 노력이 스스로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또 부끄러운 것이 아닌 게 될 수 있도록. 『가타카』를 올더스 헉슬리를 다시 봐야겠다.


*Almost Famous는 락을 알면 더 신나는 영화. 진지하지만 생각보다 가벼운 영화였다. 개그 요소도 있고, 연애물 성격도 있다. 그리고 『헤드윅』에서 헤드윅의 남자친구로 나온 아저씨가 또 밴드역을 하고 있길래 피식했다. 이 배우 여기서 또 열폭한다.


*Billy Elliot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또 자존심이라는 게 얼마나 짜증나고 피곤한 놈인지, 책임이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영화보면서 오랫만에 눈물 났다.


*이분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나중에 다시 봐야지...끗

http://thalamus.egloos.com/4175835 


2009/08/20 18:11 2009/08/20 18:11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연극을 본다고 하면, 다들 반응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
뭐지 이놈 -_- 이라는 반응도 있고, 부르주아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다들 각자의 논리가 있어서, 하나하나 맞춰서 반론해주기도 귀찮다.
(같이 보러 가자고 말도 안 꺼냈는데 왜 정색인지 모르겠다 [.....] 애초에 그러지도 않을 거지만)
물론 나도 연극 애호가가 아니며 자주 보지도 않는다. 최근에 연극을 본 건 딱 세 편.
08년 겨울에 예술에 전당에서 올려진 『갈매기』와 09년 5월에 같은 장소에서 올려진 『템페스트』
그리고 이번 8월에 본 『갈매기』가 전부다. (아마 이 세 편이 내 짧은 인생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연극이다 [...])
갈매기를 두 번이나 본 것은 그만큼 처음 접한 연극에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연극이라는 것 자체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원작을 알아야 하고(물론 몰라도 보겠지만 재미가 다르다), 극 자체만 가지고 극을 모두 이해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올려진 곳이 어디든지 연기자와 연출자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극히 짧은 견해다 [...])

갈매기를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이나 본 것은 극 자체가 굉장히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연출이나 번역,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같은 내용일지라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갈매기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해석, 서로 다른 이야기를 두서 없이 계속 던지기만 한다. 그냥 각자의 사정과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던져놓기만 한다. 그리고 결말에 가서도 그리 시원하게 해답을 주지도 않는다. 잠깐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사실 주인공이라는 단어도 적합하지 않다.) 뜨레블레프는 작가 지망생이며 다른 속물 작가와는 다른 길을 걷고자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제 이류 무대에서 서는 배우, 어머니 아르까지나와 그녀의 애인이자 자신의 경멸하는 기존의 작가 뜨린고린과 마찰한다. (그러나 극중에서 그의 분노는 방향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니나는 쉽게 더럽혀지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어 뜨린고린의 말발에 넘어가 쉽게 사랑에 빠진다. 그렇지만 금새 그에게 버려지고(작가 뜨린고린은 다시 어머니 아르까지나에게 돌아간다), 뜨레블레프에게 마지막 절망감을 안겨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어머니 아르까지나는 아들의 반항을 가소롭게 여기지만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뜨린고린과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녀는 아들을 자신과 애인을 증오하는 찌질이라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극중에서 끊임없이 "작가가 되고 싶었어."라고 이야기하는 삼촌 소린은 작가 지망생인 조카의 좋은 조력자이다. 또 조카에게 큰 기대를 거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하녀인 뽈리나는 집안의 일을 도맡고 있는 집사 사므라예프와 결혼했지만, 한때 잘나가던 훈남 의사 도른을 아직도 잊지 못해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한다.

하녀 뽈리나의 딸 미샤는 뜨레블레프를 좋아하지만 니나를 바라보고 있는 뜨레블레프에게 외면받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전처를 밟아 사랑하지 않지만 학교 교사 메드베젠코와 결혼한다.

인물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고 서로의 감정과 상황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자체의 흐름은 간단한다. 작가 지망생인 트레블레프는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직접 쓴 연극을 보여주지만 너무 난해하고 뭔지 모르겠다는 평과 함께 모두 앞에서 망신을 당한다. 그 연극의 주연을 맡은 니나는 어머니의 애인과 눈이 맞고, 그것을 눈치 챈 트레블레프는 호수의 갈매기를 쏘아 그녀에게 던진다. 트레블레프와 크게 다툰 어머니는 애인과 함께 모스크바로 서둘러 돌아가지만 니나도 배우의 꿈과 사랑을 따라 몰래 모스크바로 따라간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니나는 낙태를 하고 결국 삼류배우로 전락하여 돌아오고, 작가로서 성공하지만 다시 한 번 큰 절망감에 빠진 트레블레프는 자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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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는 같은 연극을 두 번을 보았지만  다른 두 연극을 본듯 하다. 물론 이야기의 느낌이나 주는 감동마저 전부 다른 것이었다. 러시아 연출가인 유리 부투소프는 이 원작 자체를 완전 분해한 느낌을 가져왔다. 연극 무대 자체도 높아서 압도 된 분위기, 어딘가 괴기스럽고 슬픈 분위기를 주었고, 노래나 율동을 통해 중간 중간 지루한 부분도 색달랐다. 또 감정의 격정을 절제하지 않고 훌륭하게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보는 이에게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특히 어머니와의 갈등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쉽게 잊혀지질 않는다. 어머니를 때리고, 키스하고, 서로 추궁하고 격정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은 아마 트레블레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의 갈등을 충분히 표현해주었고, 객관적으로 몰락한 배우가 된 니나와의 마지막 만남은 눈물로 번진 화장으로 애써 웃으며 트레블레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희화화 되었다.  니나는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말로 애원하는 트레블레프에게 자신은 배우의 꿈을 아직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겪은 깊은 화인을 간직한 채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이 모습은 마지막에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지만 결국 자살하는 트레블레프의 모습과 훌륭하게 상반된다) 또 모든 소도구가 치워진 텅빈 공간에서 자살하는 트레블레프를 껴안고 오열하는 아르까지나의 모습에서 결국 아들과의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마는 안타까움을 보여준다. 아무도 모르게 죽은 원작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이다.(보통 이 결말은 연출자마다 다르다고 한다.) 이 결말로 미루어보아 유리 부투소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성과 니나라는 캐릭터에게 무게를 두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 이야기에서 관객을 외면시키지 않고 이야기의 무게를 적당한 곳으로 풀었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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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극장에서 열린 박근형씨의 갈매기는 어머니와의 갈등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절망감을 극대화 시킨다. 물론 위의 그것도 마찬가지만 어머니를 괴롭히거나 키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하는 모습으로 표출되었다.(분노의 방향성이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역시 애인의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랑받고 싶어하는 불완전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인물들의 상황 묘사나 감정표현도 절제되거나 억제된 분노와 슬픔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절규와 애원이었다. 니나 역시 달랐다. 슬프지만 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작고, 외소한 느낌이 들도록 표현되었다. 그녀는 사랑 앞에서 작아지고, 그(트레블레프의 애인이자 자신의 옛애인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으나 사랑받을 수 없는 사실에 더 처절하게 비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었던 배우 역시 꿈이 아니라 돈을 위해서 밥을 먹기 위한 수단으로서 변모한다. 그리고 두 연극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삼촌 소린과 뜨레블레프를 사랑하는 마샤에게도 관계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삼촌은 트레블레프가 죽기 전 "작가가 되고 싶었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조용히 임종을 맞는다. 그리고 트레블레프의 마지막 모습은 마샤가 목격하면서 또다른 갈등(사랑)이 우울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르까지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아들의 의지와 "사랑 받고 싶다"는 아들의 마음의 죽음 사이에서 오열하지도 못한다. 이 연극에서 관계성 회복이나 관객의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부조리하고 우울한 극의 분위기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감정과 상황이 극대화 되어 아르까지나를 부곽시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총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훌륭한 갈매기였다. 특히 서이숙씨는 내가 먼곳에서 굳이 찾아온 보람을 주었다. 솔직히 예매 안 하고 가도 충분히 볼 수 있다는 아니한 생각을 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하마터면 못 들어갈 뻔 했다. 배우들이 좋다는 말을 그냥 흘려 들어서 경을 칠뻔 했다. 공연 전에 대기하다가 옆에 있던 분이 끊임없이 연극이나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조금 짜증도 났다. '제길 알면 얼만큼 안다구!'라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부럽긴 부러웠다. 뭔가 자신있게 안다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거기다가 옆에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니 정말 부럽긴 했다 [....]

마지막으로 내 근간을 이루는 모든 것을 도와주고 이 연극도 추천해준 나의 조력자에게 감사를...
그리고 다음에는 혼자가 아니라 조력자와 다시 함께 좋은 갈매기를 봤으면 좋겠다.

*사실 조연으로 등장하는 미중년 의사 '도른'이 이 연극의 굉장한 까메오다. 스토리상에 큰 비중은 없지만 위트와 재치 넘치는 말로 집중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게다가 중년 배우가 맡다보니 포쓰도 상당. 이 갈매기와의 인연은 카페에서 우연히 '도른'역을 맡은 남명렬씨에게 싸인을 받은 것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 듯하다.

*서이숙씨의 연기는 이미 『템페스트』에서 경험했으나 공연장에 들어갈 때까지 몰랐다. 목소리를 듣고 알아봤을 때, 묘하게 흥분이 되어서 더 재미있게 본 것 같다.
2009/08/20 18:09 2009/08/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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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호아킨 피닉스)와 유랑 가족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꿈을 개척하고 싶은 아들(리버 피닉스)이 마치 한 이야기의 부자 같다. 호아킨 피닉스가 수염을 길러서 그런 걸까.

이제 리버 피닉스는 젊은 나이에 죽어 더이상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고, 호아킨 피닉스는 영화계를 떠나 더이상 스크린에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레저베이션 로드>, <허공에의 질주>


2009/02/10 18:54 2009/02/10 18:54

<다우트>, 상처뿐인 영광

영화 2009/02/10 18:06 by 애나무

"만약 믿음에 근거가 있다면,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A: 어째서 아무런 소득이 없는 일에 참견하죠? 당신에게 피해가 오는 일은 없잖아. 오히려 이것을 들춰내는 것이 더 큰 피해가 될꺼에요.

B: 아무런 소득이 없다니요.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방치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그것이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A: 그렇지만 당사자나 당사자의 보호자도 원하지 않는 일이에요. 당신도 내부 고발자로 고역을 면치 못할 일입니다. 서로 좋을 게 없단 말이에요. 우리 그냥 덮어 둡시다. 게다가 당신은 나를 비난할 어떠한 근거도 없잖아요? 합리적인 근거를 기반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B: 그래요. 내가 당신을 비난할 어떤 명확한 근거는 없어요. 하지만 그날 당신은 분명히 잘못을 했다는 정황적 근거가 있어요. 당사자는 없지만 증인이 있어요. 우리 내기해볼까요? 나는 당신이 잘못을 했다는 것에 교장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내 가치관과 신앙과 사후세계까지 걸겠어요.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말이에요.

...

차라리 백리걸음 힘들더라도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 없고

비록 사흘을 굶을지언정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 없네

*『미쳐야 미친다』, 정민, 이덕무의 시.

2009/02/10 18:06 2009/02/10 18:06

레저베이션 로드 reservation road

영화 2009/02/04 02:43 by 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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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가상의 유서'를 작성해본다. 내가 과연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군가 슬퍼하겠지라는 생각이 조금하다가 스스로 몸서리친다.

내가 일상적으로 전화하는 부모님, 친구들, 선생님 그리고 이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불행한 일일까. 그래서인지 '가상의 유서'를 쓰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남겨둘 것은 있는가. 돌아보면 책장에는 잡서들이 가득하고, 원고지에 쓴 일기가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 내 부모님은 자기 혐오와 자기 부정으로 가득한 결과물들을 보면서

얼마나 슬퍼하고 답답해하실까. 나의 사람들은 나와 주고 받은 편지를 다시 펼쳐봐 줄까?

이 불행의 순간, 나는 다른 가정을 해본다. 입장을 바꿔서 누군가가 나의 곁을 떠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은 항상 내 언저리에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유보의 시간, 유보의 길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울분과 아픔과 인생에 대한 절망감이 느껴진다. 무력한 공권력에 대한 혐오와

그보다 더 무력한 자기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원수를 찾고 싶다.

그리고 원수에게 그에 걸맞는 죄값을 안겨줄테다. 그 죽음이 온당하기보다 공평하길 바란다.

막상 원수를 찾아서 총부리를 겨누고, 이제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데‥‥ 당겨야 하는데‥‥

결국 이자도 소심한데다 이기적이고 자기 혐오에 빠진 더러운 인간 아닌가. 지독한 인간.

그래 차라리 네가 이 자리에서 죽는 것보다, 앞으로 더 살아서 네 자식보다 훨씬 긴 인생을

기어코 살아서 생의 아픔, 슬픔, 괴로움, 쓴맛, 신맛 전부 맛 볼 수 있는 만큼 다 맛보고 늙어가길.

그게 가장 잔인한 복수가 될 테니까.


*마지막의 저주는 김광규 시인의 시집에서 인용했으나, 시집이 손에 없어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다.
**위 사진의 출처 : http://blog.naver.com/martinyup

2009/02/04 02:43 2009/02/04 02:43

디파이언스, 자문자답

영화 2009/01/18 21:36 by 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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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에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나'는 깔끔하게 머리 모양을 만들고, 말쑥한 정장 느낌의 옷을 입고 있다. 이 기다리는 '나'를 비판적이고 싶고, 논리적이고 싶은 '나'로 정의한다. 그래서 기다리는 '나'는 시간 약속을 중요시 한다. 그가 불만에 찬 표정으로 커피를 들이킬 때, 드디어 '내'가 당도한다. 사과도 하지 않고 불쑥 앉아서 물을 들이킨다. 사과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어색한 것인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래. 너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이 어쩔 수 없는 '나'를 즉흥적인 '나'로 정의한다. 그에겐 체계적으로 훈련된 사고나 논리가 없다. 자기만의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한 치다. 기다리는 '나'는 또 이런 즉흥적인 '나'와 인터뷰를 해야하는지 의문스러워 한다.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와의 이야기. 그들은 우울한 자승자박을 시작한다.

(질문자는 기다리는 '나', 답변자는 즉흥적인 '나'. 그러나 이 인터뷰는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의 경계가 모호하다.)

Q: 오늘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늘 <디파이언스>라는 영화를 보고 온 것으로 안다. 최근 또 어떤 영화들을 보았는가. 3개월 이내에 본 영화들로 답변해달라.

A: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하자면, <할람 포>, 히치콕의 <싸이코>, <올드 보이>, <위대한 유산>, <눈먼자들의 도시
>, <쌍화점>을 보았다. 앞의 네 영화는 개인적으로 구해서 보았고, 뒤의 세 편은 극장에서 보았다.

Q: 이 시간에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가 <눈먼자들의 도시>와 <디파이언스>의 휴머니즘이라고 알고 있다. 나머지 영화는 휴머니즘적 요소가 없는가? 아니면 두 영화에서 공공연하게, 알기 쉽게 휴머니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인가?

A: 물론 다른 영화에서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할람 포> 같은 경우에는 새어머니와 어머니의 그림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올드 보이>에서는 딸을 사랑한 오대수가 삶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모습에서, <위대한 유산>에서는 삶의 이유가 작은 것일지라도 인간의 삶은 긍정할 수 있다는 메세지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니다. 게다가 내가 찾아낸 요소들에 헛점이 있다. 그러나 <눈먼자들의 도시>나 <디파이언스>는 아주 명확하게 휴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Q: 그렇다면 왜 이 두 영화를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주목했는가?

A: 이 영화들은 아주 비슷한 배경과 상황을 가짐으로써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는다.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는 모두가 눈이 멀어 빠지는 광기의 인간에 대해서, <디파이언스>에서는 나치즘과 전쟁,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 자행이라는 광기에 대해서 설명한다. 억압 받는 집단과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정황, 그 속에서 숱한 회의와 괴로움을 겪는 인간의 모습, 이러한 배경 뿐만 아니라 스토리 라인에서도 굉장한 유사성을 보인다. 두 영화 모두 어떤 그룹에 대한 리더가 존재하고, 그 리더의 눈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뿐만 아니라 이 리더들은 모두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쓰고 모두를 이끈다.

Q: 그렇지만 이들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는 여자가 리더이며, 여성적인 시각과 작은 커뮤니티에 문제 해결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디파이언스>에서는 남성적인 판단과 시각, 그리고 해결방법이 등장한다. 총을 쏘고, 적에게 대항하고, 내 민족을 지키는. 비록 여성도 총을 쏘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영화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총을 들지만, 남자는 여자를 보호한다."라고 하지 않는가. 조목조목 집어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A: 당신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굳이 내가 이 영화들을 연결지으려는 것은 좀 더 큰 틀에서 볼 때 '무엇이 인간다움인가?'라는 고뇌를 부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이나 팜므 파탈, 옴므 파탈적 요소들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광기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상적이지 않는가? 두 영화 모두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겪게 되는 기아(식량 문제), 인구 감소(갑작스러운 죽음), 정착지를 잃어버림, 병(감염)과 배설물로 상징화 되는 위생, 나눔, 강제적인 성교, 혼례와 의식,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신에 대한 기대와 좌절, 이것들을 설정하고 재현한다. 과연 이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있기에 이 영화들은 같은 뿌리라고 할 수 있다.

Q: 그렇다면 과연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에 결국 위의 조건은 '인간'을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셈이다. 안정적인 생활과 도덕이나 법, 의식과 같은 규칙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어떤 병일 수도 있고, 전쟁이나 집단 학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러한 요소들은 해결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뒤지고, 약을 구하고, 집을 만들고, 규칙을 세우면 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해결하더라도 영화 속에서 인간다움을 되찾았나?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는 식량을 독점하고, 무기로 무장함으로써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B병동이 등장하지 않는가. 또 그들은 버젓이 여자를 요구하고 난교를 벌이지 않던가? <디파이언스>에서도 리더가 병에 걸렸을 때, 식량을 독점하고 여자를 원하는 무리가 있지 않던가? 이것은 요소에 지나지 않다. 아마도 인간다움이란 남을 위하는 것, 즉 '사랑'을 가지고 실천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행동에 대한 책임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보이는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뒷바라지 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디파이언스>의 자신의 식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려운 사람을 하나 둘씩 데려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또 포로로 잡혀온 독일군이 곤혹을 처하자 난감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지 않는가.

Q: 인간다움이 곧 '사랑'이라... 조금 애매한 개념 아닌가?

A: 좋다. 당신들의 구설수에 잘 오르는 권력power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눈먼자의 도시>에서 권력자=리더는 '보다See'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힘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위해 기꺼이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모두가 시력을 잃어버린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앞장서고 희생한다. <디파이언스>의 리더=지휘관commander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며, 규칙을 세우고, 집행하고, 의견을 수렴한다. 그는 독일군과 싸울 무기가 있고, 병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약자나 여자들을 지키기로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뗄 수 없는 식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받아들이지 않나? 인간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혹자의 말로 '정치적인 옳바름'-
사실 최근에 본 <쌍화점>에 실망을 금하지 못했던 것은 확고한 메세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동성애 코드나 왕과 왕비 그리고 왕의 내연남이라는 삼각구도에 대한 어떠한 불만이나 환상은 없다. 영화에서 이러한 조건에 대한 정서적인 동질감이나 비극성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눈이 영화 속의 미학적 감수성을 잡아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란 메세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느낌 뿐만 아니라, 메세지 말이다. 인류는 비슷한 이야기 뼈대(플롯)에서 반복적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영화가 볼만 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뚜렷하고 '정치적인 올바름'이 담겨있는 메세지가 있기 때문이다.

Q: 당신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공감하긴 힘들다.

A: 아직 내 공부가 부족하다. 이해해달라.

Q: 마지막 질문이다. 혹시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책이 있는지?

A: 얼마 전에 읽다가 내려놓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싶다. 다음 주 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9/01/18 21:36 2009/01/18 21:36

작은 사랑의 멜로디

영화 2008/09/21 21:43 by 애나무

서로 진지하게 사랑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요?

오래된 영화지만 차분한 감동을 줍니다.

진지하게 사랑하는 초등학생들이 친구들의 축복을 받아 결혼하는 이야기.

아름다운 결말이 있는 이야기. 사랑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답기를.

"우린 벌써 일주일 동안 사랑했잖아."
2008/09/21 21:43 2008/09/21 21:43

팀버튼 - 에드우드 Ed wood

영화 2008/09/02 02:04 by 애나무
 

에드 우드(Ed Wood) 1994년 미국

비록 생전에 인정 받지 못 했지만 그의 열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에드 우드 감독의 이야기입니다.

섹스& 시티 캐리 역의 사라 제시카 파커와 조니 댑의 도살장 이별씬이 인상 깊은 영화.

"당신은 누구의 꿈을 찍고 있습니까?"
2008/09/02 02:04 2008/09/02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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